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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해보는 고민

친구가 같은 남자에게 두번 실연당했다.


[2008년 12월 14일]

예전에 예전에
연하남을 만난 적이 있다.
6살 연하와 8살 연하.
6살 연하를 먼저 만났었는데 아~ 이래서 연하구나~라고 절절히 느꼈었다.
다음에 만난 8살 연하는 나이에 비해 생각이 깊은 사람이라서
그닥 나이차이를 느낄 일이 '많지 않았던'것 같다.
'많지 않았던'거지, '없었던'거는 아니었다.
그 사람이 살아보지 못한 8년을 난 더 살아봤고,
8년이라는 세월은 많은 것을 보고 듣고 배우고 겪기에 긴긴 시간이었으니까.
나이 차이는 큰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사람 됨됨이가 문제지.

그리고 지금은 긴긴 시간동안 싱글라이프.
이주일, 14일이나 입원을 하는 수술을 하는데도
와서 간호해줄 연인이 없다.
게다가 크리스마스 지나서 퇴원한다.
그리고 지금은 발목을 삐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티비만 주구장창 보고 있다.

예전에 예전에
내 친구도 연하남을 만난 적이 있었다.
8살 연하였다.
그때 그 남자는 군인.
친구들과 모여있는 자리에서도 애인 전화만 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전화를 붙들고 늘어져있고
짬짬히 문자질.
게다가 휴가 나올때마다 친구들 만나는 자리라든가
결혼식 등등 온갖 행사마다 같이 다니는 닭살이라니.
둘이 있는걸 보면 참 귀여웠었다.
아이들 연애처럼 손 꼭 잡고 다니고
간혹 같이 다니다 이상한 소리가 나서 뒤돌아보면
둘이 뒤따라 오면서 토닥토닥 장난치고 있고.
보기엔 좋았지만 난 친구가 걱정되서 정리하는것이 좋지 않을까,
몇번 이야기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친구가 눈물이 글썽해서 한 말이 있었다.
-내가 행복한게 싫어?

그렇게나 알콩달콩 귀엽게 사랑하던 친구커플은
녀석이 제대한 후 크리스마스 전날 헤어졌다.
하필 두사람과 친했던 내가 중간에 끼어서 둘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었다.
남자는
-나이도 어리고 자리도 못 잡았는데
그여자 좋은 사람 만나게 해주고 싶다고
자신은 아직 능력도 없고 자신도 없다고
여자는
-고생해도 같이 있으면 된다고
같이 있으면 이겨나갈 수 있다고
그 애 아니면 안된다고

둘의 입장이 이해는 되지만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당장 내 친구가 전화기 붙잡고 엉엉 우는 것도 화가 났었고
그 추운 날씨에 남자의 집 부근에서 덜덜 떨면서 기다리는 것도 화가 났었고
이별통보를 전화로 하고 도망쳐 있는 녀석에게도 엄청 엄청 화가 났었다.

그리고...삼년이 지난 시간.
이런저런 이유로 친구와도 자주 만나지 못하다가
간만에 친구들이 모인 자리를 끝내고 둘이 TGI잠실점에 갔다.
그동안 간간 만날때마다 같은 대화가 오갔었다.
(둘은 같은 동네에 살기때문에)
-소식은 듣냐고 혹시나 마주친적 없냐고.
-한번도 마주친 적 없다고 잘 지낸다는 소식은 듣는다고
이젠 아무렇지 않다고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다 잊은 줄 알았었다.
장장 3년인데, 한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잊는게 잊혀지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좋아하는 립이 나오고,
하나를 열심히 뜯으면서 같은 질문을 하고 같은 대답을 듣고.
그 다음에 내가 덧붙인 말.
-녀석, 여친 생긴 것 같더라. 싸이에 보니까,...
말하다 문득 고개를 들어 친구를 보니 소리없이 눈물이 뚝뚝.
-내가 순정만화를 너무 봤나보다.
내 나이 서른다섯살이 되면 다시 만나질 줄 알았어.
만나면 다시 사귀게 될 줄 알았어.
나처럼 그애도 나만 그리워하면서 지낼거라고 생각했어.
내가....순정만화를 너무 봤나보다.
나 참 한심하지?

뜯던 립을 더이상 먹을 수가 없었다.
다음에 나온 음식과 얼마 먹지 못한 립 모두를 포장해서
동생 갖다 주라고 친구에게 들려서 보냈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못 잊었을까?
어떻게 보지도 못하고 연락 한번 없었으면서 그렇게나 사랑하고 있었을까?
친구가 사랑한 건 정말 녀석일까, 녀석이라는 이름의 환상이었을까?
같은 남자에게 두번이나 실연당한 거잖아?

화가 나서 버럭 해버렸었다.
바보냐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냐고.
다시 만나고 싶었으면 다시 만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냐고.
여전히 그때와 처지는 달라진 게 없는데다가
녀석은 쭉쭉빵빵 팽팽하고 이쁜 애들이 눈에 들어올건데
너 스스로 가꾸기라도 했냐고,
울고 있는 친구가 속이 상해서
어이없게 또다시 실연당해버린 친구가 마음 아파서
버럭 버럭 소릴 질러버렸었다.

이렇게나 일편단심인 내 친구에게서 도망가버린 놈이 미웠고
기다리기는 커녕 또다시 연애를 하고 있는 놈이 미웠고
내 친구따위는 깨끗하게 잊어버렸을 놈의 가벼운 사랑이 미웠다.

그땐 정말 이해할 수 없었다.
어이없게 두번이나 실연한 친구가 이해 할 수 없었다.
순정만화에 나오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아무리 오래 헤어져 있어도 하염없이 서로 그리워하는
그딴 사랑을 이해 할 수 없었다.
그딴 만화에나 나오는 사랑을 실천에 옮기게 할 정도로
환상적인 사랑이란 놈이 이해할 수 없었다.


발목이 삐어 누워있는 동안 9회말 2아웃이라는 드라마를 봤다.
하나티비 덕분에 주욱 이어서 끝까지 봤다.
보다말고 혼잣말도 많이 했다.
그 중에 김삼순이 했던 명대사도 있었다.
-추억은 아무런 힘도 없어요~ 라는 말.
9회말 2아웃을 보다가 왜 갑자기 삼순이가 생각이 났는지 모르겠다.
근데 드라마와 삼순이의 명언과 친구의 사랑이 갑자기 확~~
이해가 될똥말똥 했다.
(아직 완전히 이해된건 아니다.내가 이해할 문제도 아니고.)
잘은 모르겠지만 친구 심정이 알듯 말듯 했다고나 할까.
그리고 밀려오는 쓸쓸함.

그때 내가 계속 화를 내니까 친구가 그랬었다.
왜 자꾸 화를 내냐고. 속상한건 난데 왜 니가 화를 내냐고.
그래서 괜스리 TGI에 화살을 돌렸었다.
다시는 TGI잠실점에 안 올거라고. 절대로 안올거라고.
립은 먹을거구? 음..그건 내가 좋아하는거니까 먹을지도 몰라.
그런 황당한 대화와 웃음으로 끝내긴 했지만
씁쓸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어쨌거나 난 이제 TGI잠실 롯데월드점은 다시는 안갈거다. 다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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