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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맘대로 말하기

애호박을 사다. 그리고...


[2010년 5월 13일]

간만에 마트가 아닌 재래시장을 다녀왔다.

거기서 호박을 사왔다.

요즘 마트에서 파는 허리없이 일자로 비닐에 갇혀서 자란 호박이 아닌

허리가 약간 잘록하고 궁뎅이가 조금 통통한 재래식 애호박이다.

난 애호박을 꽤 좋아한다.

호박전을 지져도 맛있고, 된장찌게 끓여먹어도 맛있고,

각종 찌게에 넣으면 달근하니 맛있는 호박이 참 좋다.

것도, 시골 할매모냥 흐물흐물하게 푸욱 익은 호박이 좋다.

그런데 요즘 마트에서 파는 비닐호박(처음부터 비닐에서 자라 일자로 날렵하게 빠진 모양의 호박)은

왠지는 모르겠지만 살이 단단해서 칼로 썰어지는 느낌도 단단하고

된장을 지져도 살이 별로 퍼지지도 않고 살각살각거린다.

그냥 제멋대로 자란 호박은 허리가 너무 가느다란 것도 있고 덜 가느다란 것도 있고

칼로 썰어보면 부드럽게 썰어지는데다가

찌게를 끓여보면씨부분이 흐물거릴정도로 푸욱 익어서 참 좋다.

게다가 더 달고 맛있는 것도 같고....

호박을 보는데 꼭 서울아이와 시골아이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내 친구중에는 서울 토박이가 있다.

정말 서울 촌놈이다.

내 고향은 청주.

지금은 대도시(?)지만, 나 어릴때도 분명 도시였지만,

우리집 뒤에는 논과 밭이 있어서

봄이면 농부 아저씨랑 누렁소랑 같이 논밭을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논에 벼가 자랄때면 논에서 우렁이를 잡고 개구리알을 건지며 놀았었다.

달고 매운 무우 새순을 베어먹기도 했었고,

배추 잎새를 뒤집어보면 교과서에 나오는 배추흰나비의 알과

엄청 부지런하게 배추를 갉아먹는 애벌레를 볼 수 있었다.

큰 감자를 수확하고 나면 인심 좋은 주인은 알감자를 남겨놓아 지나가는 사람들이 주워다 먹게 해 주어서

봄감자가 날 때쯤이면 난 친구들이랑 같이 알감자를 주워다가 엄마에게 조려달라고 하기도 했고,

가을에 콩을 거둘때면 콩서리 해다가 친구들이랑 구워먹기도 했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보면 소년과 소녀가 무우를 서리해 먹다가

맵고 지리다고 던져버리는 장면이 있다.

진짜로, 아직 다 자라지 않은 무우는 맵다.

나도 소나기에 나오는 소년처럼 덜 익은 무우를 서리해 먹다가 두어입 먹고 버린적이 있다.

담장대신 탱자나무를 키우는 집이 있었는데, 탱자나무 가시가 얼마나 크고 단단하던지.

그 탱자나무 담장 아래로 그 집의 텃밭에 키우는 딸기를 서리해 먹느라 팔에 가시는 또얼마나 찔렸는지.

참외를 서리해 먹었었는데 밭에서 막 딴 참외는 미지근해서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참외만큼 시원하진 않지만

훨씬 달고 맛있었던 것 같다.

친구랑 둘이 배추뿌리를 잘라다가 연필깍는 칼로 깍아 먹었는데

어찌나 맛있던지 한고랑의 배추뿌리를 몽땅 잘라먹고는 배추만 고대로 세워놓은 적도 있었다.

아마도 뿌리가 없어진 배추는 다음날 바로 시들었겠지.

한고랑이나 되는 배추가 죄다 시들었으니 주인은 얼마나 황당했었을까.

근데 어찌된 추억이 서리해 먹은 기억이 이렇게 많다냐...도적년의 계집도 아니고...

명암저수지 아래 언덕엔 산딸기랑 비스므리한 맛대가리 없는 뱀딸기가 있었는데

것도 맛있다고 열심히 먹었었고, 산포도(그게 머루였다는건 훨씬 나중에 알았다)도 많이 따먹었었다.

투명한 비치볼을 들고 강바닥을 보면서 발꼬락으로 올갱이(다슬기의 충청도 사투리)를 잡아다가

올갱이 국을 끓여먹기도 했었고

밭 가장자리에서 자라는 깻잎과 오이를 따다가 먹기도 했다.

물론 우리 밭은 아니고...남의 밭에서 자라는 것.

주인에게 걸리더라도 뭐라 하지도 않았고. 적당히 따 가라는 소리나 듣는 정도?

우리 학교 뒤에는 보리밭이 있어서 점심시간에 도시락 까먹고 낮잠도 한숨 자고 왔었다.

옛 소설에 보면 보리밭에서 사고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그걸 이해 했었다.

낮잠 잔다고 드러누워 있으면 높이 자란 보리때문에아무도 못 보니까.

계집애들 서넛이 같이 밥먹고 배부르다고 낮잠 자고 학교 종소리 듣고서야 부리나케 교실로 달려가고..

보리 수염은 왜 그리 따갑던지.

엄마가 '회초리는 물푸레나무가 최고라던데,'라면서 물가에서 물푸레나무를 꺾어오셔서

그 나무로 종아리 맞을땐 증말이지 세상에 물푸레나무처럼 꼴보기 싫은 나무가 없었다.

이맘때면 쑥이랑 냉이랑 돌미나리를 캐러 가곤 했었는데.

쨌든 나에겐 시골스럽지만 이렇게 재미있는 추억들이 참 많다.

그런데, 서울 토박이인 친구는 그런 추억이 하나도 없단다.

가끔 내가 진달래를 뜯어먹으면 먼지투성이니까 얼른 뱉으란다.

하긴, 내가 진달래뿐 아니라 개나리나 장미꽃 등등 아무거나 죄다 뜯어먹긴 하지만,

이 친구는 산에서 들에서 나는 대다수의 식물들이 큰 독은 없다는걸 잘 모른다.

어릴때 추억이라곤 그저 놀이터에서 놀았던 기억밖에 없단다.

그네뛰고 흙장난 한 기억. 그거 외엔 이렇다할 추억이 없단다.

요즘 서울 아이들은 무슨무슨 체험, 해서

내가 어릴적 당연하게 놀았던 놀이들을 일부러 돈 내고 체험하러 간다지.

그래도 스릴 넘치는 서리의 추억은 만들지 못할텐데.

비닐에 갇혀 자란 단단한 일자 호박은

호박전을 지져놓으면 크기가 쪼옥 고른 것이모양이 이쁘다.

하지만 개성이 없는 것이 꼭 서울 촌놈같은 맛이랄까.

제멋대로 자란 호박은 허리가 잘록한지라 호박 하나를 썰어 전을 지져도

크기가 들쭉날쭉하다.

맛? 내 입에는 제멋대로 호박이 더 맛있게 느껴진다.

더 부드럽고 더 달큰한 맛이다.

시골스러운 맛이라고 할까.

겨우 호박하나 가지고 너무 감격하는 것 같지만,

마트에서 일자의 단단한 비닐호박만 먹다가

간만에 시장에서 멋대로 생긴 호박을 보니가 너무 반가워서 덥썩 사들고 온 길이라서

감동이 좀 길었다보다.

두개나 사왔으니 하나는 지져먹고 하나는 부쳐먹어야지.

랄랄라~~ 내일은 맛있는 된장찌게에 호박전을 먹겠구나~~ 랄랄라~~

맛있는 반찬도 먹고, 즐거운 추억도 떠오르고.

이래 저래 난 애호박이 좋다니깐.